그 자리에서 한 분이 말했다. 앞으로는 ‘깡’을 가지고 채비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도 장례에서 좀 ‘깡다구’를 부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재택임종’으로 말이다.
임종 장소를 논의하는 공공의 장에서 ‘자택(自宅)임종’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자택’이라는 단어는 소유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월세방에서의 임종은 누군가에게 불편한 일일까? 편안한 죽음이 집을 소유한 사람만의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채비플래너 김수동 선생님으로부터 네덜란드의 ‘임종의 집’ 사례를 들었다.
암스테르담 외곽의 작은 마을 나르던(Naarden)에는 ‘베이나 타위스 하위스(Bijna Thuis Huis)’라는 공간이 있다. 직역하면 ‘거의 집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은 호스피스도 병원도 아니며,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임종의 집’이다. 자원봉사자들이 24시간 곁을 지키고, 가족들은 눈치 보지 않고 머물 수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의료기기 대신 창밖의 편안한 풍경을 바라보며 소중한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다. 현재 네덜란드 전역에 이런 곳이 200곳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많은 사람이 요양병원의 복도에서, 응급실 침대 위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집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여전히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고, 집주인에게는 불편을 끼치는 일로 여겨진다. 몇 년 전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나라의 비참한 병원 임종 현실을 본 적이 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를 6인실 병실에 두었는데, 새벽에 그분이 돌아가셨다. 유족은 울지도 못하고,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기괴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기필코 ‘임종의 집’이 있어야겠다고. 소유하지 않아도, 넓지 않아도, 마을 한가운데에서 낯익은 사람들과 함께, 돌봄을 받으며 평안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생산이 멈추는 노년과 죽음의 시간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못난 시대정신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도 없고, 쓸모없는 순간도 없다. 오히려 삶은 죽음과 뒤엉킬 때 비로소 찬란하게 빛난다.
손 닿을 만한 곳마다 임종할 좋은 장소를 마련하자. 사람들이 첫 출근을 하면서, 학교에 가면서, 생일 파티에 가면서도 장례식장과 무덤을 보게 하자.
그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코스피 1만보다 더 나은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오늘도 깡다구를 부려본다.